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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역사와진실

암호명 '여우사냥' 명성황후 시해사건 과 우장춘박사

by 비라코 2020.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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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박사하면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하다

명성황후와 우장춘박사는 어떤 연결점이 있는것일까?



씨 없는 수박...
 
이 말을 들으면 일부 가슴이 뜨끔해지는 남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장춘 박사를 떠올릴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재산도 가족도 그리고 자존심도 모두 잃어버린 한국민들에게 당시 세계적 명성을 얻고있던 육종 학자 우장춘 박사의 존재는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씨없는 수박은 그런 한국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준 연구 성과였다




일반 수박은 씨가 영양분을 다 흡수하고 남은 것만 과육에 저장 되지만, 씨없는 수박은 영양분이 씨에 흡수되지 않고 고스란히 과육에 저장되기 때문에 당도와 맛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진 종자다

수박의 염색체 조작으로 개발된 '씨 없는 수박'은 개발 당시 실제 씨는 있으되, 종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었다

 

사실 씨없는 수박은 우장춘 박사가 개발한 것은 아니다

1947년 일본의 유전 학자인 기하라 히토시에 의해 최초로 개발된 이래, 우장춘 박사에 의해 한국 최초로 시범 개발된 것이다

우장춘 박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알고 있는분들 계신데 이번 기회에 정확히 아시면 좋을것같다

 

이 씨없는 수박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


프랑스 주간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기사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났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등에 의해 기획되고, 규슈, 구마모토 출신 낭인 30여명과 일본군 수비대등에 의해 저질러진 이 치욕스러운 사건은 일국의 황후를 궁궐에서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전무 후무한 충격적 사건이었다


을미사변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 낭인들 사진


을미사변은 일본인들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적지않은 조선인 공범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주회, 구연수등으로 당시 명성황후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친일 정치인 및 군인들이다

을미사변 당일 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경복궁에 난입했거나 애초 함께 공모한 사람들이다

이중 주목할 사람은 조선 후기 무신이자 개화파로 사건 당시 훈련대 2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우범선이다

그는 1895년 10월 7일 명성황후가 친일 성격이 짙은 훈련대를 해산하라고 명하자, 이에 반감을 품고 10월 8일 새벽 부하 병사들을 투입하여 일본 낭인들과 함께 경복궁에 난입한 주모자중 한명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여우사냥'으로 불려진 이 날의 폭거에서 우범선은 숨진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붓고 불태우는 과정에 참여할 정도로 가담 정도가 중대했고, 이 사건 이후 비분강개한 이 천만 조선인들에 의해 죽여야 할 역적으로 손꼽히게 된다

위험을 감지한 그는 1896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인 여자 '사카이 나카'와 결혼후 일본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일본까지 추적해 온 조선인 열사 '고영근'에 의해 1903년 살해되어 조선의 국모를 살해한 죄값을 치르게 된다

우장춘 박사는 이 용서할 수 없는 민족의 반역자 우범선의 아들이다

조선인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사이에서 1898년 태어난 아들 우장춘은 아버지의 사망이후 고아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생활을 한다


왼쪽이 우범선, 오른쪽이 사카이 나카, 가운데가 우장춘


1923년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와 결혼한 우장춘은 1926년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라는 일본 이름을 갖게 되고, 이후 그의 자식들은 모두 한국 성씨 [우]씨 대신 [스나가] 성을 쓰게되었다

우박사는 1936년 도쿄 제국 대학에서 세계 최초로 자연종을 합성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낸 [종의 합성론]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올라간다

 
농업 생산력 향상이 지상 과제였던 1950년대 한국 정부 초청으로 1950년 3월 아버지의 나라 한국으로 돌아온 우장춘 박사는 한국 농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씨없는 수박도 당시 그가 만들어낸 공로중 하나였다

한국어를 하지 못했던 우장춘 박사는 그 공로로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으며 한때 농림부 장관직까지 제의받았으나 고사한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의 죄값을 씻기 위해서였는지,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 돌아온 1950년(당시 53살)부터 사망한 1959년(62살)까지 한국에 체류하는 내내 열정적으로 연구에 매달렸으며 그 덕분에 한국의 원예 육종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그는 심지어 어머니의 임종 소식에도 일본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정부가 그의 장례식 참가를 불허했다는 사람도 있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을 것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출국을 불허했다는 사람도 있다)


한국 체류중 모친상을 당한 우장춘 박사


부산 동래구 온천 2동에 소재한 우장춘 기념관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다

어머니 임종에도 일본을 가지 못한 그에게 주위에서 많은 조의금이 전달됬고 그는 그 돈을 모아 우물을 팠다

당시 마실 물이 부족했던 주위 사람들과 연구소 사람들이 다같이 그 우물을 나눠 썼다고 한다

지금도 우장춘 기념관에는 그 우물이 남아 있다

 
한국 과학 연구소, 동래 농업 시험장, 부산 국립 원예 특작 과학원, 한국 농업소등에서 근무하며 한국 육종산업을 이끌었던 우장춘 박사의 인생이나 그의 가족사는 대한제국 시절 조선의 상황만큼이나 드라마틱 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

짐작은 가지만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든 복잡한 의미를 가진 존재였을 것 같다

 
일본, 한국 두 나라에서 모두 버림받은 불우한 성장기를 거쳤고, 후엔 양국 모두에서 모셔가고 싶어했던 성공한 과학자로 살았으며, 아버지의 죄 값을 씻기위해 한국 전쟁 기간에도, 어머니의 상중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던 고뇌에 찬 노년을 살았던 우장춘 박사의 인생은 증오와 그리움, 부끄러움과 자부심, 강한 애착과 허무함이 뒤섞인 질곡많은 삶이었을 것이다




2011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우장춘 박사의 장남 '스나가 모토하루'가 아버지의 유품 몇 점을 한국 정부에 보내왔다고한다

어수선한 조선말기에 비참하게 죽어간 명성황후와 불안에 떨다 결국 살해당한 우범선,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며 살았을 우장춘, 한국에서 끝내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을 그의 아들 '스나가 모토하루'

그들 모두 어찌보면 불쌍한 사람들이자 시대의 희생자들이 아니었나하는 복잡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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