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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역사와진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의 의문을 알아보자

by 비라코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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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선조님들도 인터넷 접속이 된다면 좋겠다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의문점들에 대해 돌아가신 선조들이 위키피디아에 직접 설명을 달아줄 수 도 있고, 후손들이 네이버 지식in에 궁금한 점 을 적으면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거나 잘 못 알려진 지식도 고쳐줄 수 있지 않을까 ? 

지식 내공이 일정 수준 쌓이면 다시 환생시켜주는 시스템이 있다면 아마도 지금 인터넷은 돌아가신 선조들의 포스팅, 댓글로 넘쳐날 것이고, 역사에 관심많은 후손들에게는 하루 하루가 풍요로워 질것이다

 

물론 선조와 후손간에 악플질로 인한 감정 싸움의 위험성이 없진 않지만, 국가간 역사 왜곡도 없어지는 긍정적 효과도 발생할 것이다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면 내가 선조들에게 첫번째로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임나 일본부설에 관한 것이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중국 명칭으로는 호태왕비로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높이 6.39m, 무게 37톤, 총 글자수 1775자가 수록된 비문으로 초,중,고 역사 시간에 침 흘리며 자지 않았다면 최소한 한번정도는 들어봤을 유명한 유물이다

이 비는 전체 비문 중 핵심적인 141자가 세월에 닮아 없어지거나 파손되면서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해 한, 중, 일 삼국의 역사 논쟁, 그 중심에 서 있다.  

 

보물로 인정받기 전 야외에 방치되어 있던 광개토 대왕릉비


이 비문을 정치적으로 처음 이용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1882년 일본군 사쿠오 중위가 비문의 탁본을 정계에 보고한 이후 광개토 대왕릉비는 일본의 임나 일본부설에 대한 증거 자료로 사용된다

임나 일본부설은 일본 야마토 정권이 백제, 가야, 신라를 세력권에 두고 4C부터 6C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는 이론이다

말도안되는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로 매도되 온 이 이론이 어떻게 이 비와 관련되 있는 지 보자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OO新羅, 以爲臣民.

 

광개토 대왕릉비문상의 위 문장이 당시 일본 학계가 제시하는 임나 일본부설의 근거였다

'백제와 신라는 예전에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계속 조공을 해왔지만,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OO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즉, 왜가 신묘년 391년에 한반도로 도하해서 7국, 4읍을 점령하고 임나(가야)에 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일본 서기의 기록을 증명하는 자료라는 것이다

중간의 두 글자는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 학설은 일본의 조선 강점과 맞물려 한반도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측면에서 일본 정계, 학계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위 내용에서 두 글자가 누락되어 정확한 의미 파악이 어렵고, 당시 일본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지배를 할만큼 제대로 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했었다는 점등 허구성이 많은 이론이었다

 

한반도를 식민 통치한 일제가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유물을 찾기위해 신라, 가야 고분에 열심히 삽질을 했지만 결국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음으로써 임나 일본부설은 딸랑 일본 서기에 나오는 손오공 구름타는 듯한 태고적 전설과, 해석상 아리까리한 이 비문 두개를 결정적 증거로 울궈먹는다

세월이 지나면서 일본내에서도 이 이론에 대한 신빙성은 떨어져가던 중, 2010년 3월 23일 제2기 한일 역사 공동 연구위원회에서 한,일 역사 학자들의 합의로 임나 일본부설은 폐기하기로 결정된다

 

일본 다음으로 이 비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나라는 우리나라 한국이다

일제 식민지 기간중 임나 일본부설의 반박을 위한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못했던 한국 학계는 1972년 5월 이 이론에 대한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된다

일본 와코대 전 교수인 이진희 박사가 일본 현지에서 비문 조작설을 주장한 것이다

광개토 대왕비 여기 저기에서 언급되는 '왜(倭)'의 존재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못했던 한국 입장에서 조작설은 그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주었다

 

요미우리 신문에 게재된 특종보도를 통해 재일 이진희 박사는 사쿠오 중위가 당시 영토 확장을 위한 명분을 찾던 일본 군국주의 맹신자 였다는 점과, 탁본을 확인한 바 석회가 검출된 점등을 들어 이 비문이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광개토 대왕 초상화


임나 일본부설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 논리를 마련치
못했던 한국 정계와 학계는 이진희 박사의 주장을
감사히 수용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국정부에 의해 광개토 대왕릉비가 1982년에 공개되기 전에 나온 이 주장은 오로지 탁본만을 검토한 추정 의견이었다

즉 실제 비문의 확인은 없었다는 뜻이다

이후 중국측의 정밀 검사시 글자에 대한 조작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일제 조작 시점 전에 이미 중국인이 뜬 동일한 내용의 탁본이 발견되면서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당시 한국 정계나 학계는 과학적 검사나 체계적인 역사 연구 없이 감사하게 이 주장을 줏어먹었다

학문적 반론에 시간을 쓰는 것보다 '그건 니가 조작한거자나' 라고 우기는 것이 얼마나 노력대비 효율적인
방법인가?

더군다나 상대가 일본이니 우리 나라 국민들의 맹목적인 믿음은 이미 약속된 것이었고 국민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 증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었던거다

학계가 애국심에 기대어 '않봐도 뻔해' 식으로 우긴 역사적 사례중의 하나다

고구려 수렵도


요새 국내 학계 의견도 일제에 의한 비문의 조작은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실제로 11번이나 '왜'가 비문에 언급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비문 내용상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왜가 건너온 것이 아니라 백제, 신라를 격파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서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이론과, 왜는 당시 한반도 남부에 출몰하던 왜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의견외 다양한 의견들이 아직 존재한다

어느 날 당시 고구려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한 7C에 제작된 유물이담긴 타임캡슐을 땅속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한, 위 주제의 정답을 찾는데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한편, 그간 조용히 한국과 일본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떡이나 먹던 중국이 슬그머니 옆자리에 끼어든다

고구려와 광개토 대왕을 중국 지방 정권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 공정을 어느 틈에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은 비문에 나오는 '왜'의 의미 해석에 있어서 일본의 편을 들어준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에 대한 한국의 주장을 인정하면 동북공정에 역행하는 삽질이 되는 셈이니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을 지지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한반도 북부는 중국 지방 정권이었고 남부는 왜가 통치했으니 한반도에는 독립적인 정권 자체가 없었다고 우길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이 지금의 간도땅이나 만주 벌판에 대한 역사적 소유권을 주장할 역사적 근거 자체를 인정치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동북공정의 대상 고구려 역사


일본보다 사실 조용히 동북 공정을 진행해 온 중국이 더 얍삽하고 비열하다

그들은 비문에 뭐라고 적혀 있던

'고구려가 당시 중국 정권과 맞짱 뜬 나라든
아니었든 간에'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는것이다

임나 일본부설에 대한 일본의 억지는 고구려 역사 왜곡에 대한 중국의 강한 의지와 스케일에 비하면 귀여울지경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비문의 내용은 조작된 것이 아니며 왜라고 불린 무력 집단이 실제 한반도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한,일 공히 인정하는 대목이다

다만 '왜'라는 집단이 실제 일본에서 건너온 집단인지, 왜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가야 같은 남부 토착정권을 비하해서 부른 것인지등이 해석상의 난제로 남아있다

왜(倭)는 왜 거기에 그렇게 많이 적혀있었던 걸까? 

광개토 대왕님에게 진실은 뭐냐고 묻는 다면 답변을 뭐라고 해주실지 심히 궁금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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