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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역사와진실

고려 최정예부대 '삼별초의 난' 은 쿠데타일까? 아니면 혁명일까?

by 비라코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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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몽 항쟁의 화신인가 쿠데타 
반란군인가 ? 
1270년 삼별초의 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어느 집안이 있었다.

 

국왕을 꼭두각시로 만든 이 집안은 수 십년간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며 국민들을 착취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국왕을 위협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민중들의 봉기를 진압하기위해 특별한 친위대를 운영하는
동안 정규군은 갈수록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국방력은 급격히 위축된다.

 

이 친위대는 정권 유지를 위해 특별히 창설된 정예
부대로 일종의 특수 부대였다. 

부대의 성격상 부대원들은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일반
백성들과는 차원이 다른 특혜를 누린다. 

이 부대의 지휘권을 쥔 자는 누구든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 정권을 뒤집어 엎을만큼 막강한 힘을 갖게 되고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강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된다. 

 
나라의 방위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더 챙기던 이 정권은
마침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외국군의 침입을 받게 된다.

육상 전투에 능하고 해상전투에 약한 침략군에 맞설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 정권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천명하며 수도를 섬으로 옮겼으나 그 의지는 이내 
사그라 들고 이 부대는 침략군에 대항한 전투보다는 사치와 향락에 빠진 정권의 보위유지에 동원된다.

 
육지에 남겨진 백성들은 스스로 침략군에 맞서 싸우면서도 백성들의 고통을 뒤로 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정권에게도 항거하지만 이 특수부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부대는 이라크 후세인의 혁명수비대나 나치 친위대 혹은 전두환의 쿠데타를 보위한
신군부를 묘사한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위 이야기는 우리가 대몽항쟁의 화신으로
알고있는 삼별초를 묘사한 글이다.

삼별초는 야별초의 좌, 우별초와 신의군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야별초는 고려시대에 수도 치안을 맡은 정규군인 금오위와 수도의 방위를 맡은 3위가
있었음을 감안할때 
반란, 봉기 전담 특수 부대였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즉, 삼별초는 대몽 항쟁을 주로 했던 부대가 아닌 백성들을 탄압하고 정권유지에 쓰이던 무신정권
호위대였던 것이다.


최씨 정권 4대 집권자 최의가 김준에게 죽임을 당할때 동원된 부대도 바로 이 야별초였다.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한 이후 최의 -> 김준 -> 임연 -> 임유무 등으로 정변을 거쳐 집권자가 바뀌면서 애초 천도 목적과는 달리 강화도는 정쟁속에 휘말려들었고
백성들의 안위는 잊혀져갔다. 

여러 차례 무력 정변의 주력군으로 활용된 삼별초는 주인이 바뀌어도 그 중요성으로 인해 특혜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몽고의 침략 이후 38년, 무신 정변 100년 만에 당시 임금 원종은 송송례, 홍문계등과 함께 임유무를 죽이고
개경으로 돌아가 몽고와 화평교섭을 맺는다.

무신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했던 특수 부대 삼별초를 해산해서 과거 기득권 세력의 근본을 뿌리뽑으려는 원종의 왕권 회복은 반대로 삼별초 구성원들에게는
기득권의 상실일수 밖에 없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결심이었는지 몽고 정부에 입조한 원종에 반해 진정한 대몽 항쟁을 하려했던 것인지
삼별초의 난의 이유는 학자마다 갈리지만
난을 일으킨지
3일만에 삼별초는 본진을 진도로 옮기면서 
몇가지 조치를 취한다.   

 

삼별초 이동 경로



개경 천도 결정에 따라 강화도를 빠져나가던 당시 귀족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는 그해 6월 새 독립정부를 세우고 승화후
온을 황제로 받들어
이후 진도 -> 제주도로 이어지는 고려 몽고
연합군과의 전투를 개시한다.

여기서 진정한 대몽항쟁이었다면 왜 귀족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는지, 왜 새로운 황제를 옹립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왜 강화도를 탈출하려는 백성들에게까지 화살을 쏘면서 막고 그들을 진도까지 끌고갔는지 도 의문이다.  

 
몽고에 입조한 원종을 부정하고 고려 왕조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의미로 새로운 황제를 옹립했다는 학설이 많기는 하나, 항전을 목적으로 한 군사 부대가 새로운
왕권까지 만들면서 국가의 형태를 갖추려
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즉, 이것은 몽고뿐만 아니라 그간 무신 정권에 억눌려 살았던 왕권의 부활을 부정한 행위로 그들이 보위했던 무신정권의 시각과 일치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 다른 목적성이 있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진도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혹 삼별초의 행동은 그간 누려온 자신들의 기득권을
새로운 황제로부터 계속 인정받고 반대파의 가족을 이용해 안위를 지키려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삼별초는 몽고와의 투쟁 내용과
별도로 시작부터 쿠데타 반란군이 되는 셈이다.

그 반란을 진압하는 데 국가 상비군 체제가 약했던 고려는 몽고군과 함께 연합군을 꾸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대몽항쟁으로 미화된 부분이 있다. (박정희의 군부 쿠데타 정통성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삼별초는 1273년 4월 28일 총 160 척의 전함으로 공격해온 연합군에게 제주도에서 패하면서 역사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삼별초와 려몽 연합군 전투장면



진도 - 제주도 전투 기간의 삼별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대몽 항쟁의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정권의 하수인으로 민중을 학대했던 삼별초의 개전 의지가 과연 순수한 대몽항쟁이었는 지 아니면
상실하게 될 기득권에 대한 반발이었는 지는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내려야 할 판단이라고 본다.

삼별초가 무신 정권의 후원자로서 누려온 입지를 잃고 다시 노비, 천민으로 되돌아갈 위험과 그 명단이 원종에
의해 몽고에 전달될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나머지
스스로 해결책을 만든것은 아닐까 ?

즉, 몽고에 대한 항쟁의지보다 는 자신들을 해체할 고려 정부에 대한 반기로서 봉기한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 진실은 아마도 초기 진도 전투를 지휘했던 배중손,
노영희등 삼별초 지휘관들에게 직접 물어봐야 속시원히 알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간 역사는 권력을 손에얻은 승자에 의해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다시 쓰여지는게 일반적이었다.


이유가 어쨌든 5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삼별초의 난이 새로이 부각되었고 대몽 항쟁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지게 된 점은 시사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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